옻칠, 종이를 품다
지천芝泉 김은경
| 옻칠미 연구소장, 한국옻칠협회 부이사장
키가 한 웅큼 자라면 어머니는 작아진 스웨터를 훌훌 풀어 구불대는 털실을 솥에 넣었다. 한 김을 쐬고 나면 실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낭창이는데 여기에 새 실을 엮어 다시 옷을 짓곤 했다. 옷도 나처럼 매년 한 웅큼 자라난 셈이다.
나는 나이 오십에 옻칠에 매료되었다. 주인의 손을 탈수록 색이 살아나고, 금이 가고 이빨이 나가도 다시 옻칠을 입히면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옻칠 그릇은 옛날 어머니의 스웨터처럼 그리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미끄러지듯 빛을 반사하는 질감은 옻칠기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었고 나는 공부를 할수록 옻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빠져들었다.
특히 주목한 것은 '옻칠'과 '종이'의 만남이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한지에 옻칠을 입힌 '지태칠기'를 즐겨 써왔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고, 방수성과 방부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명맥이 거의 끊기고 말았지만 우리 고유의 종이 '한지'로 만든 '지태칠기'를 되살린다면 세계에 자랑할만한 한국 전통 공예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옻칠과 종이를 잘 결합시키면 친환경 천연소재로서 의식주 생활 전반에 걸쳐 활용이 무궁무진하다. 이러한 옻칠의 효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대학시절 약학 공부로 쌓은 화학적 지식과 옻나무와 옻칠이론에 정통한 은사 권순섭 교수님의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옻칠조형학 박사의 길을 열 수 있었다. 또한 종이연구가 김경 선생님께 배운 한지 노엮개는 옻칠과 한지가 결합한 지태칠기에 눈을 뜨게 하였다. 두 분께 마음 깊히 감사드린다.
예술로서의 옻칠화와 옻칠기 뿐 아니라, 옻칠의 많은 가능성과 쓰임을 알리고 싶어 이 공간을 열었다. 기물을 소중히 대하며 삶 속에서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키워온 우리나라의 소중한 옛 문화를 옻칠과 더불어 살리고 싶다.
여기에 조금이나마 일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겠다.